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평도 포격전 (문단 편집) === 결과 === 1시간 가량(14시 34분~15시 41분) [[조선인민군|북한군]]이 발사한 포탄들로 인해 군 막사가 파괴되고 인근 숲 등 10곳이 불에 탔고 떨어지는 포탄들 중 몇 개가 주민들이 사는 가구 위로 떨어져 [[민간인]]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상가 건물이 붕괴되었다. 또 해당 지역 소방서에는 차량이 1대뿐이며 전담 소방요원도 2명밖에 없는 데다가 전기도 끊어진 상황이라 진화 작업이 힘든 탓에 마을이 전소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다급히 24일에 소방차 24대가 긴급 투입되면서 포격으로 10여 곳에 발생한 산불과 가옥과 창고 등을 태운 주택가 화재까지 모두 진화되었다.[* 의용소방대뿐만이 아니라 자진해서 소방작업을 지원한 시민들로도 부족해 인천에서 배타고 온 소방 요원들까지 가세한 후에야 제대로 진압을 끝냈다.]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101124183312727&p=ked|#]] 대치 중이던 [[F-15K]]와 [[MiG-23]]은 결국 [[MiG-23]]이 도주하면서 [[대한민국 공군]] 측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YH2010112407320001300_P4.jpg|width=100%]]}}} || || '''[[대한민국 해양경찰|해경]] 호위를 받으며 인천 본토로 피란하는 연평도 주민들''' || 1,7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피를 완료했다. 포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오후 2시 20분에 [[인천항]]에서 온 여객선이 도착한 뒤 포격이 시작되자 미처 내리지 않은 원래의 승객과 부두로 도망쳐 온 주민 일부를 태우고 인천항으로 회항하기도 했다. 발발 직후 [[연평도]]로 향하는 모든 항로는 폐쇄되었고 23일 오후 11시 일부 주민들은 자기들의 어선으로 인천 본토로 대피하였으며 나머지 주민들은 [[방공호]]에 대피했다. 다음 날인 24일부터는 본격적인 피난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이하 해경)의 지원 하에 어린이, 노약자, 환자를 우선하여 346명의 주민들이 해경 경비함 두 척에 나눠 타고 오전 7시에 연평도를 출항, 오후 2시경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 해경 공기부양정과 해군 공기부양정(러시아제 [[무레나급]])이 167명을 추가로 더 태우고 오후 3시에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7시에는 다시 추가로 17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25일에는 운항이 재개된 여객선과 해경 경비정을 이용하여 추가로 172명이 인천 본토로 피난했다. 25일까지 연평도 전체 주민의 80%에 달하는 1,115명이 인천으로 대피했고 남아 있는 민간인은 약 280명 선이었다. 외신들은 연평도 마을들을 둘러보며 [[유령도시]](Ghost town)란 표현까지 썼다. 처음에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는 걸로 파악되었으나 11월 24일 오후에 민간인 2명의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25일 오후 4시 10분 인천 본토에 도착했다. 2010년 11월 26일 오후부터 어민들의 조업이 재개되었다. 쳐놓은 그물들을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허가를 내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목숨 같은 그물을 건지러 가는 어민들의 심정이 충분히 예상된다. 이 사태로 연평도 주민들이 일정 기간 [[연평도]]를 비운 사이에 몇몇 절도범들의 [[절도죄|절도]] 행위가 발생하여 경찰에 도난신고가 접수되었다.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5&c1=05&c2=05&c3=00&nkey=201011262055083&mode=sub_view|#]]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